오른손/사과

로또를 안 사는 건 나쁘다 - 최금진

웃음의 여왕♥ 2011. 5. 18. 16:04

로또를 안 사는 건 나쁘다 - 최금진


로또가 얼마나 끔찍한 악몽인지
로또방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그러나 끝자리를 분석하거나 홀짝의 조합을 분석하는 일은
여느 사무직과 다르지 않다
왜 사느냐, 를
왜 로또를 사느냐, 로 이해해도 무관하다
이 늦은 밤에 왜 또 여기로 왔는가,
자신에게 몰래 질문을 던지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번호를 찍는다
로또를 사지 않는 10%의 고소득층은 얼마나 좋을까
로또를 사지 않아도 천사가 지켜주니까
하지만 얼마나 나쁜가, 빈익빈 부익부의 나라에서
왜 사느냐, 를 묻지 않아도 되니까
오십이 더 넘은 사내는
누가 볼까봐 손을 가리고 찍는다
술 냄새에 절어 들어온 사내는 앉자마자 묵상을 한다
갓 스물을 넘은 청년은 줄을 서지 않는 자들을 무섭게 흘겨본다
순서를 어기는 것은, 누군가 자신을 앞서 가는 것은
견딜 수 없이 우울하다
번호에 대한 집념은 때묻지 않는 종이와 같아서
어떤 검은색이든 쪽쪽 빨아들인다
예수를 부르고, 조상님께 기도하고, 아이 생일을 떠올리며
아무도 답하지 못하는 질문에 답이라도 하듯
숫자를 체크해 나가는 손들
두툼한 돈뭉치를 한번만이라도
남의 멱살처럼 당당하게 움켜잡아보고 싶은 불쌍한 분노들
왜 사는가, 왜 로또를 사는가, 묻지 말자
다만 살 뿐이다,
그러므로 로또를 안 사는 사람들은 심각하게 죄질이 나쁘다
그게 비록 숫자일지라도
단 한 번도 뭔가에 평생을 걸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시작』, 2008년 여름호.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